어쩌다보니 추석 연휴 첫날에 레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구독자님은 이미 집이신가요? 저는 어제 먼저 집에 내려와있습니다. 강아지랑 둘이 지방으로 내려오려니 챙길 것이 한짐이었으나 어찌저찌 잘 왔답니다. 올해는 추석이 유독 빠르네요. 본가의 아파트 화단에는 대추나무가 여러그루 있는데요, 미처 붉게 여물지도 못한 청대추가 주렁주렁한 것을 보니 더욱 실감이 납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보면 직장인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사원증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요즘 사원증 또 예쁘잖아요. 와 멋있어! 나도 가지고 싶어!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몇 년 전 한 클라이언트사에서 제게 웃으며 임시사원증을 만들어주셨는데요, 너무 기뻤으나 다음날 집에 두고 와서 회사 건물에 혼자서는 못들어가게 된 후로 사원증 로망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명절 선물세트였어요! 받아본 적이 없는건 아니지만(첫 회사의 명절 선물 = 죽방멸치) 알록달록한 포장을 한 선물세트가 어쩐지 너무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명절 즈음 마트에 가면 한가득 놓여있는 그 선물세트들이요. 퇴근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한 손에 선물세트를 들고 서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게 왜그렇게 부러웠는지 몰라요. 제가 살 수도 있지만, 그걸 볼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휑-했습니다. 

클라이언트사의 홍보팀에서 인스타그램 속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절 선물을 보내는데, 정작 외주로 일한 나는 명절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을 때마다 많이 외로웠답니다. 다들 무언가를 들고 집에 가는 명절의 퇴근길에 제 손만이 비어있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게 뭐라고 싶지만 프리랜서는 대부분 일의 최전선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쉽게 잊혀지는 존재라는 점이 저를 외롭게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회사가 커지면 꼭 함께해주는 외주 담당자 분들에게 명절선물을 보내야지'하고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에도 제가 친구한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제게 서프라이즈로 명절 선물세트를 보내줬습니다. 저는 사실 이 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친구에게는 사실 별거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받아보고 싶었거든요. 정말로 이게 뭐라고. 임시사원증을 받고 설렜던 날처럼, 이 커다란 박스 덕분에 한 주 내내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선물 세트 안에는 카놀라유와 올리브유, 스팸 등이 들어있었는데요, 특히 스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죠. 명절 음식도 좋지만, 명절의 참된 꽃말을 스팸이라는 것을....오늘은 본격 21세기의 제철음식 스팸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갑자기 이게 머선 맥락이냐고요 사실 맥락은 없습니다. (당당) 하지만 다들 스팸 들어있는 선물 세트 받으셨다면! 집에 이제 스팸이 많아질 때란 말이죠! 저는 스팸을 떠올리면 구이보다도 부대찌개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나요! 바삭하게 구워진 햄도 좋은데 약간 물에 빠져서 보들보들 해진 식감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휴 내내 집에서 느끼한거 먹고 나면 속이 니글거려가지고 매콤한게 먹고싶어지더라고요. 그럴땐 역시 부대찌개가 최고죠.

캔 스팸이 늘 정답이지만, 사실 저는 생각보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 1인가구로서 스팸 한 캔은 두세끼에 나눠 먹어야 해서, 잠시 잊어버리면 상해 버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요 제품을 아주 좋아합니다. 스팸 두 장 정도의 사이즈가 한 장에 들어있는데요, 네모 모양이라서 샌드위치에 넣기도 좋고, 집에서 혼자 먹을때 아주 요긴해요. 부대찌개를 만들 때도 1인용으로 만들때 딱 좋은데요, 오늘도 이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밖에서 부대찌개를 사먹어 본 적이 없어요. 부대찌개는 늘 집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릴때 이따금 조여사(=엄마)가 부대찌개를 끓여줬고, 저는 그 날을 정말로 좋아했어요. 조여사는 부대찌개만큼은 꼭 그리들같이 생긴 넓은 전골팬에 구절판 담듯이 재료를 예쁘게 돌려담고, 중간에 양념을 넣고 육수를 넣어서 자박하게 끓여냈거든요.

모양만 다른게 아니라 재료도 조금 달랐어요. 원래의 부대찌개와는 다르게 콩이나 다른 소세지는 넣지 않고 딱 스팸만. 김치, 양파, 파, 스팸, 그리고 떡국떡을 넣어 끓입니다. 저는 옆에서 양파나 파를 썰기도 하고, 아니면 조여사가 썰어놓은 것들을 팬에 열 맞춰 넣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대찌개는 아무리 작은 양을 만들어도 예쁘게 자리를 잡아 넣어서 끓이게 되더라고요. 저한테는 그게 부대찌개의 모양인거에요. 오늘은 어떤 냄비를 고를까 하다가, 홍콩의 동료가 선물해준 광동식 솥을 사용해보았습니다. 원래는 광동식 솥밥을 하려고 했는데요! 어쩐지 높이와 사이즈가 1인용 부대찌개에 딱 맞을 것 같더라니. 정답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뚝배기에다가 넣고 끓이는데요, 이 친구가 아주 제격이었어요.

집에서 했던 것 처럼 양파를 먼저 썰어서 가지런히 위아래에 놓고, 신김치를 적당히 집어서 썰어넣었습니다. 각각 양파 옆에 올려서 자리를 잡아주고, 물에 살짝 불린 냉동 떡국떡과 8조각으로 자른 스팸을 조심스럽게 담았어요. 그리고 대파를....넣었어야 했는데....? 레터를 쓰다가 알았습니다 대파 안넣었네 나....대파 없이도 맛은 있었어요...하지만 대파가 있었으면 더 맛있었겠지 😥

조여사가 늘 그랬던 것처럼, 양념장은 중간의 빈 부분에. 육수를 끓여야 하는데, 사실 귀찮아서 그냥 맹물에 연두를 조금 탔습니다. 사골국물을 넣기도 하는데, 저는 사골국물을 넣으면 너무 맛이 진해서 부담스럽더라고요. 묘하게 쌈마이한 이 부대찌개의 맛이 또 아니기도 하고요. 대충 있는걸로 막 끓이는 요리라는 점을 기억하며 슬렁슬렁 만들었습니다.

뚜껑을 덮지 않고 보글보글 끓였어요. 팬이 작은 만큼 육수에 재료들이 다 충분히 잠겨 익도록 젓가락으로 이리저러 공간을 내주면서 지켜보았습니다. 이럴때마다 어쩐지 또 일드 '오센'의 대사 "맛있어져라(오이시쿠나레 | 美味しくなれ)"가 떠올라요. 어린시절의 제가 너무 사랑했던 드라마😂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한 요리가 맛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정도 부대찌개가 끓으면, 부대찌개의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슬라이스 치즈! 비싸고 멋진 이름을 가진 치즈 말고, 이 슬라이스 치즈가 중요합니다. 슬라이스 치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부대찌개에서 만큼은 예외입니다. 부대찌개를 끓이려다가도 이 치즈가 없으면 그만둘 정도에요. 이 치즈가 없으면 부대찌개는 완성될 수 없어....전에 모짜렐라 치즈를 넣었었는데 이 맛이 아니더라고요. 노란 치즈요. 치즈를 올리고 뚜껑을 덮어서 치즈를 살짝 녹였습니다. 드디어 완성입니다.

따끈한 흰 밥을 준비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직 잔열이 남아 끓어오르는 국물 위의 잘 녹은 치즈를 국물 속에 풀어헤쳤어요. 

  그리고 스팸 한 조각을 꺼내 밥 위에 척 올려봅니다. 저는 뭐든 아껴먹는 어린이였는데요, 부대찌개 속의 스팸을 유독 아껴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가는데, 조여사가 스팸을 적게 넣어주던 것도 아닌데 스팸 한 조각을 두 세 조각으로 나눠서 밥 위에 조심스레 얹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 스팸을 아껴먹지 않아도 되는 어른인데요! 정신을 단디 붙잡지 않으면 어느새 스팸을 조각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맙니다. 정신차려! 너는 이제 스팸을 마음껏 먹어도 되는 어른이야! (물론 염분과다는 조금 조심해야 하지만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밥 위에 커다란 스팸 조각과 김치, 양파를 얹은 후 국물과 함께 먹어봅니다. 맛있고 짜고 하나도 안 건강한 맛! 최고입니다. 아! 백선생님의 팁은 아주 유용했습니다. 된장이 이렇게 맛의 깊이를 더해주는거였군요. 선생님 오늘도 매우 감사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이면 즐겁기도 하지만 즐겁지 않은 일들도 종종 생기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모쪼록 즐거우시고, 느끼한 속은 귀가 후 부대찌개로 풀어주세요!

스팸 👉 원하는 만큼!

김치 50g

양파 1/5개

대파 1대

떡국떡 6조각

물 300ml + 연두(or 다시다) 1/2t

슬라이스 치즈 1/2조각

양념

고춧가루 2t

다진마늘 손톱만큼

간장 1t

된장 1/2t

설탕 1꼬집

  

* 사골육수를 쓰신다면 연두는 생략하셔도 됩니다.

** 만약에 라면사리를 넣고싶으시다면 물의 양을 400ml로 늘려주세요! 라면사리는 반개 기준입니다. 1개를 다 넣으신다면 500ml로 해주세요.

최근 새로 생긴 양조장에서 나온 꿀술이 마음에 들어서 오늘의 술로 선정해보았습니다. 메들리(Medley) 양조장에서 나오는 '아카시아'라는 미드입니다. 달큰한 맛이 도는 탄산감 있는 술인데요, 아카시아 꿀로 만들었다는데 은은한 소다향이 나요. 어른의 라무네 같은 맛이랄까요?

부대찌개와 찰떡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사이다를 곁들이는걸 좋아하거든요. 근데 이 술이 약간 그런 느낌이에요. 시원하고, 탄산감이 있고, 달큰한. 1인용으로 딱 좋은 하프보틀(=375ml) 사이즈가 나온다는 것도 엄청난 장점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라벨이 귀엽습니다....

아! 송편이랑 잘 어울려요 이 술!!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셨지만 저는 밤송편파입니다. 통밤이 들어간 송편이요! 남은 송편이랑 먹기에 좋은 술이니까 꼭 주문해서 드셔보세요!

여담이지만, 제게 명절 선물세트를 보내줬던 친구가 다음달에 결혼을 한답니다. 제 유일한 대학교 친구인데요, 이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 명절 선물세트가 생각이 나요. 저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다정하고, 무엇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따뜻하고 예쁜 사람. 저는 이 친구를 늘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이 친구가 보냈던 명절 선물을, 저는 웨딩 촬영 부케로 되돌려주었습니다. 아주 예쁜 부케였는데, 웨딩촬영을 하는 날의 친구보다는 예쁘지 않더라고요 😂 

연휴인데 제가 또 말이 길었네요. 풍요로운 계절 안에서 좋은 이야기가 가득한 매일이 구독자님과 제 친구에게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마음 깊이 빌며 9월의 마지막 레터를 마칩니다.